진실은 어디에 Revisit

주사위는 아직도 구르고 있는걸까? 아직 루비콘 강을 다 건너지 못한걸까?

혹자는 인간이란, 우주 에너지의 흐름에 의거한 존재이며 生부터 정해진 운명을 사는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1분1초가 새로운 선택의 연속이라며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라 주장하고. 이미 예정된 줄거리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잠재된 진실 또한 이미 단단하게 굳어진 불변의 것이라는 설명이 되는데 이는 앞서 ‘진실은 어디에‘ 에서 살펴본바, 옳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이란 언제나 상대적이기에 사실에 근거한 진실 또한 같은 의미를 계승한다. 그렇기에 진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조차 상대적이며 재조명되고 재해석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예를들어 내가 빵 도둑으로 몰렸다고 하자. 이떄 내가 빵을 훔치지 않은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내가 훔쳤다는 정황이 나열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들이 모아지면 그 논리에 따른 결과는 내가 도둑이라는 종합적 사실을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내가 아는, 즉 훔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약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나를 보았다는 증인이 있다고 하자. 이때 증인의 주장 또한 진실이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진실과는 다르다. 이런 경우 두가지 진실의 교집합은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실이고 진리일 수 있을까?

다수의 사람들이 나와 증인의 진실을 무시하고 그들의 종합적 사실을 진실로 주장한다면, 그들에게 진리란 그들이 믿는 진실의 통계일 수 밖에 없다. 즉 내가 빵을 훔쳤다는 것이 진리가 되고, 나의 주장은 거짓이 된다. 결국 진실은 이해타산이고 진정한 진실이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수가 인정하는 사실이 진실이고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만, 범위를 인간사회 밖으로 확장한다면 진실과 진리의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진실은 어디에‘ 를 다시 방문한 이유다.

위에서 설명한 진실과 진리는 모두 타인이 주장하는 사실에 근거한 사회적 결론이다. 이러한 사회적 굴레에 구애받지 않고 볼 때, 내가 알고 주장하는, 즉 내가 빵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되지는 못할 지언정 진정한 진실로 남는다. 그리고 그 진실은 증인의 진실과 맺는 교집합 없이도 홀로 분명한 진리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진실과 진정한 진실은 다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진실은 있다. 다수의 이해와 주장에 의해 묻혀 아무도 볼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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