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관

오늘 생각깊은 친구 한명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영생을 믿지 않는다는 나의 글을 읽고 종교관을 글로 써달라는 부탁에 아래와 같은 짧은 답을 써주었다.
( 참고: 2006/10/02 – [me thought] – 난.. 누구지.. )




cube (영화 cube의 그것) 안에 갇혀 오직 하나뿐인 구원의 출구를 위해
온갖 암호와 퍼즐을 옥신각신 헤쳐가며
나름의 정의와 각자의 방식으로 몸서리 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신랄한 답문이 왔다.

구원의 출구를 찾기위해… 아니 잠깐만,
구원을 찾는 그 ‘과정’은 결국엔 ‘삶’을 얘기하는거 아닐까.

삶에 있어서 종교의 의미는?

구원의 출구로의 그 길의 지침점이 바로 종교? 그게 종교의 역할?
구원 받아짐을 목표로하는 종교가 또 있을까마는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 받음’은 목적에 가깝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그건 영생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신을 두고 영접하는 종교의 의미말고, 종교의 필요성은? 아.. 나도 내가 뭔말을 하는건지..
암튼, 오빠의 글은 동문서답인 듯..


내가 애초에 좀 성의없는 글을 준것 같아 답문 겸 해서 다시 정리해보았다.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가 종교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 내 첫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모든 종교에는 단연 신도들이 추앙할만한 감칠맛 나는 목표가 있을테고, 그것이 구원이든 해탈이든 영생이든 어휘 자체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게다.

인간의 삶에 있어 종교는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태고적 부터 인간은 무한한 자연을 숭배했고, 조직통솔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신-사도-군중, 혹은 우리/그들 등의 개념을 구상하여 오늘날까지 비교적 성공적인 실적을 올리고 있다.

어찌되었든 바쁜 현대인들에겐 이런 자질구레한 사실보다는, 의지하고 심신을 기댈 무언가 필요할 뿐. 목표가 동일한 공동체는 사공이 아무리 많더라도 어디론가 힘차게 노를 젓는다. 함께 노를 젓는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간간히 밀려오는 개인적인 감동과 형언 불가능한 경험들에 만족하며, 손에 든 노를 더욱 힘주어 쥐는 것.

이 모든 신실한 사회적 현상들은 내겐 주변에 펼쳐진 cube 조합들일 뿐이다.

cube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정교하며 복잡하다. 너른 세상에 숨쉬는 듯 하지만, 결국 육면체 안이다. 치이고 비비고 울고불며 외치다 행복에 취해도, 결국 육면체 안이다. 각자의 공식과 고민으로 굳은 심지를 불태워도 결국 육면체 안이고, 그것은 각각의 육면체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노력이다.

구름위를 걷든 깨닳음을 얻든, 육면체는 내겐 비좁다.


다행히도 위 글로 내 종교관을 이해했다는 대답을 얻었다. 이렇게 정리해본것이 나도 처음이라 나름 신선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자주 생겼으면 좋겠구만..ㅎ